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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도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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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병도(1916년)는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자 민영휘의 손자로,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조선은행, 동일은행 취체역, 매일신보 발기인을 역임하며 실업계에서 활동했고, 광복 후에는 을유문화사를 창립하여 문화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며, 퇴임 후 남이섬을 인수하여 개발했다. 또한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과 교류하며 문화예술 지원에 힘썼다. 1975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훈했으며, 2006년에 사망했다.

2. 생애

민영휘의 손자이자 민대식의 아들로 경성부에서 태어났다.[1] 경성고등보통학교와 일본 게이오의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민대식이 세운 동일은행 이사를 지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38년 주식회사로 바뀔 때 발기인[2]으로 참여하는 등 젊은 나이에도 조선 실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조부 민영휘가 민병도 명의로 고액의 국방헌금과 비행기 대금을 내 태평양 전쟁에 협조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정인보, 최남선, 여운형, 안재홍, 손기정 등과 함께 을유문화사를 세우고, 조선아동문화협회를 창립하여 출판과 문화 진흥에 힘썼다.[1] 임원식과 함께 고려교향악단을 창단하여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기틀을 마련했다.[1]

한국은행 총재로 재직하면서 증권 파동과 제2차 통화 개혁의 뒤처리를 맡았다. 정부의 무리한 차관 도입 압력과 재무부의 은행감독원 장악 시도에 맞서 사임함으로써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퇴임 후에는 남이섬을 인수하여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힘을 쏟았다.[1]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과 함께 나무 심기에 헌신했고, 현대미술관회를 창립하여 민간 문화예술 기반을 넓히는 데도 기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경제 부문에 백부 민대식과 함께 이름이 올랐지만, 최종적으로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2. 1. 일제강점기 활동

경성부에서 일제 강점기 반민족행위자인 민영휘의 손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민대식은 민영휘의 소실 소생 중 맏아들이었다.[1]

경성고등보통학교와 일본 게이오의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했다. 민대식이 창설한 동일은행 취체역(取締役; 예전 주식회사의 이사(理事)를 일컫는 말)을 지냈으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38년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발기인을 맡았다.[2] 젊은 나이에도 조선 실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조부 민영휘가 민병도 명의로 고액의 국방헌금과 비행기 대금을 헌납하여 태평양 전쟁에 협조하기도 했다.

2. 2. 문화예술 지원 활동

민병도는 광복 후 혼란스러웠던 해방 공간에서 지식인으로서의 길을 고민하며, 1945년 정인보, 최남선, 여운형, 안재홍, 손기정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출판사인 을유문화사를 창립했다. 민족문화 선양과 선진 세계문화 섭취를 목표로 삼은 민병도는 조선아동문화협회를 함께 창설하여 출판과 문화 진흥 사업을 추진했다.[1]

정인보는 민병도에게 "35년간 일제에 빼앗겼던 우리 문화유산, 언어, 문자, 이름을 되찾으려면 35년이 걸린다."라며 출판업을 권고했다. 이는 민병도가 출판사를 설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1]

민병도는 한글을 익히지 못한 어린이들을 위해 <가정 글씨체 첩>(여경구와 결혼한 이각경의 한글 습자책)과 <어린이 글씨체 첩>을 처음으로 출판했다. 이후 어린이 그림책 <그림 동산 제1집 어린이 한글책>, 최초의 어린이 주간지 주간 소학생, 최초의 어린이 문학지 새싹문학 등을 펴내며 어린이 문화 보급에 힘썼다. 또한 조선아동문화협회 병설 직매점 문장각(文章閣) 개점, 박물관총서 간행(1948년), 학술지 월간학풍 창간, 국제연합(UN)출판부 한국총대리점 업무 개시(1955년), 조선말큰사전 완간(1957년), 플루타크 영웅전 간행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1]

해방 직후 만주에서 활동하던 지휘자 임원식이 귀국하자, 민병도는 1945년 국내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현제명, 계정식 등과 함께 창설했다. 고려교향악단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초연했으며,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민병도는 임원식예원학교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데 지속적인 후원을 했다.[1]

2. 3. 한국은행 총재 역임

민병도는 한국은행 총재 취임 후 증권파동 및 국가재건최고회의 주도의 갑작스러운 2차 통화개혁 조치에 대한 뒤치다꺼리로 금융산업을 수습하였다. 이후 정부의 무리한 어업차관 도입 압력과 재무부의 은행감독원 장악 시도에 반발하여 사직하였다. 이에 대해 금융계는 "중앙은행 독립정신의 표본"이라고 평가한다.

2. 4. 남이섬 개발

한국은행 제7대 총재 퇴임 후, 민병도는 제일은행장 등 금융기관 임원으로 재직하며 모아 놓은 급여와 퇴직금으로 1965년 남이섬을 인수하였다. 민병도가 처음 남이섬과 인연을 맺었을 당시, 남이섬은 오늘날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였고, 비만 오면 반쯤 물에 잠기는 버려진 땅이었다. 당시 강남 개발이 논의되던 시기였기에 주변 사람들은 강남 땅 투자를 권유하였으나, 민병도는 이를 뿌리치고 “푸른 동산 맑은 강은 우리의 재산, 성심껏 다듬어서 후손에게 물려주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남이섬에 수천 그루의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1]

1970년 신민당 문예행정특보위원을 잠시 지낸 그는 신민당 탈당 이후,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변변한 관광휴양지가 없던 시절 주한 외국공관 외교관들이 휴가철에 일본 등으로 출국하여 돈을 쓰고 오는 것을 방지하고, 건전한 국민관광지를 육성해 달라는 권유에 따라 1966년 12월 23일 남이섬을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였다. 이후 면세점 사업 등에서 얻은 재원을 모두 남이섬 나무 심기와 문화예술 지원에 수십 년간 쏟았다.[1]

같은 시기인 1962년 천리포에 부지를 매입해 1970년부터 수목원을 가꾸기 시작한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Carl Ferris Miller)과 민병도는 평생에 둘도 없는 의형제로서 각자의 터전에서 나무 심기에 힘썼다. 민병도는 천리포수목원이 1979년 재단으로 정식 인가될 때부터 18년간 이사로 재직하며 나무를 가꾸었는데, 이는 당시 헐벗은 민둥산만 있었던 대한민국에 50년 후의 후손들에게는 푸르고 울창해 질 나무나라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1]

2. 5. 기타 활동

문화공보부 행정공보위원(1969년), 신민당 문예행정특보위원(1970년) 직을 각각 잠시 지냈다. 신민당 탈당 후,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권유에 따라 1966년 12월 23일 남이섬을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변변한 관광휴양지가 없었고, 주한 외국공관 외교관들이 휴가철 일본 등으로 출국하여 돈을 쓰는 것을 방지하여 외화 유출을 막고, 건전한 국민관광지를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면세점 사업 등에서 일군 재원을 모두 남이섬 나무 심기와 문화예술 지원에 수십 년간 쏟았다.

1962년 천리포에 부지를 매입해 1970년부터 수목원을 가꾸기 시작한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Carl Ferris Miller)과 평생 의형제로서 각자의 터전에서 나무 심기에 힘썼다. 민병도는 천리포수목원이 1979년 재단으로 정식 인가될 때부터 18년간 이사로 재직하며 나무를 가꾸었다.

1978년에는 김수근, 설원식과 함께 미술관 지원을 목적으로 한 최초의 시민단체인 <현대미술관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민간 문화예술기반 확대에 힘썼다. 전국 미술애호가들 간의 네트워크화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운영을 돕고, 문화예술적 삶을 즐기려는 시민 및 미술관 간의 밀착을 도모함으로써, 경제개발시대에 민간 분야 문화예술 흐름의 빈틈을 채워 주었다.

이후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 회장과 학교법인 휘문의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06년 타계할 때까지 남이섬의 큰 어른으로서 항상 어린이들과 함께 나무를 손수 심고 가꾸었는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훈하였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제 부문에 백부인 민대식과 함께 선정되었지만 백부 민대식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반면 부친 민천식과 민병도 본인은 수록에서 제외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민두호
조부민영휘
조모안유풍 (풍문여자고등학교 설립자)
부친(양부)민천식
법적 백부(생부)민대식 (동일은행 두취)
사촌형민병수
숙부민규식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부인?
아들민웅기
민지
5촌 조카민덕기


참조

[1]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02-01
[2] 서적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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